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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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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6세는 1165년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로 태어나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시와 시인의 후원자였다. 1186년 시칠리아 공주 콘스탄체와 결혼하여 시칠리아 왕위를 얻을 기회를 얻었으며, 1191년 로마 황제와 황후로 대관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위 계승 분쟁에서 승리하여 시칠리아 왕이 되었으나, 과도한 확장 정책과 강경한 통치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1197년 말라리아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신성 로마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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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196년의 《리베르 아드 호노렘 아우구스티》에 실린 동시대의 초상화
1196년의 《리베르 아드 호노렘 아우구스티》에 실린 동시대의 초상화
칭호로마인의 황제
즉위1191년 4월 15일
대관식1191년 4월 15일, 로마
선임자프리드리히 1세
후임자오토 4세
칭호 1독일 왕 (로마인의 왕)
즉위 11169년 8월 15일 ~ 1197년 9월 28일
선임자 1프리드리히 1세
후임자 1필리프 및 오토 4세
대관식 11169년 8월 15일, 아헨
칭호 2이탈리아 왕
즉위 21186년 1월 21일 ~ 1197년 9월 28일
선임자 2프리드리히 1세
후임자 2오토 4세
대관식 21186년 1월 21일, 밀라노
칭호 3시칠리아 왕 (여왕과의 공동 통치)
즉위 31194년 12월 25일 ~ 1197년 9월 28일
선임자 3굴리엘모 3세
후임자 3콘스탄차 1세
섭정 3콘스탄차 1세
공동 통치공동 통치자
배우자콘스탄차 1세 (1186년 결혼)
자녀프리드리히 2세
왕가호엔슈타우펜 가문
아버지프리드리히 1세
어머니부르고뉴 여백작 베아트리체 1세
출생일1165년 11월
출생지네이메헌,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197년 9월 28일 (31세)
사망지메시나, 시칠리아 왕국
매장지팔레르모 대성당
매장일1198년 5월
왕위 계승
선제후프리드리히 1세
후계자필리프
오토 4세

2. 생애

1165년 나이메헌에서 프리드리히 1세와 베아트릭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169년 6월, 네 살의 하인리히는 밤베르크에서 로마 왕(독일 왕)으로 즉위하였다. 1184년 5월 20일 성령강림절에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회의에서 동생 슈바벤 공 프리드리히 6세와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 회의에는 참가자들에게 선물이 주어졌고, 동시에 기사들의 토너먼트가 열리는 화려한 행사였다.[33]

1184년 10월, 하인리히와 시칠리아 공주 콘스탄체[34]의 결혼이 성립되었다. 1186년 1월 하인리히는 자신보다 열 살 연상인 콘스탄체와 밀라노의 산탄브로지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33][35] 이 혼인으로 교황령을 사이에 둔 남북의 두 강대국이 동맹을 맺게 되어, 로마 교회에게는 위기적인 상황이 되었다.[33]

하인리히는 비테르보의 고드프리에게 교육을 받았고, 프리드리히 폰 하우젠을 포함한 여러 시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지식의 재능으로 구별되고, 유창함의 꽃으로 장식되었으며, 교회법과 로마법에 정통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시인이자 시의 후원자였으며, 현재 바인가르텐 수도원의 노래 악보에 포함된 "카이저 헨리히"라는 노래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89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1세가 제3차 십자군 도중 사망하자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같은 해 11월 18일 시칠리아 왕 빌헬름 2세가 사망했다.

1184년 결혼 당시의 약정에 따르면, 빌헬름 2세 사후 왕국의 통치권은 콘스탄체와 하인리히에게 상속될 것으로 되어 있었다.[36] 그러나 1189년 12월 반 로마 제국파 궁정 신하들에 의해 레체 백작 탕크레드가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인리히는 시칠리아로 향하려 하였으나, 작센·바이에른의 군주 하인리히 사자공이 망명지 잉글랜드에서 귀국하였기 때문에, 하인리히 사자공에 대한 대처에 쫓겨 시칠리아 원정이 저지되었다.[38] 1191년 1월에 이르러서야 하인리히는 이탈리아로 향할 수 있었다.[39]

이후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 왕위 계승 분쟁, 황제 즉위와 통치, 세습 제국 계획과 실패, 죽음과 유산 등의 과정을 겪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165년 나이메헌에서 프리드리히 1세와 베아트릭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169년 6월, 네 살의 하인리히는 밤베르크에서 로마 왕(독일 왕)으로 즉위하였다. 1184년 5월 20일 성령강림절에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회의에서 동생 슈바벤 공 프리드리히 6세와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 회의에는 참가자들에게 선물이 주어졌고, 동시에 기사들의 토너먼트가 열리는 화려한 행사였다.[33]

1184년 10월, 하인리히와 시칠리아 공주 콘스탄체[34]의 결혼이 성립되었다. 과거에는 1173년경 프리드리히 1세의 딸 베아트리체와 시칠리아 왕 빌헬름 2세의 혼인이 제안되었고, 하인리히와 콘스탄체의 혼담은 1180년경부터 추진되었다.[33] 1186년 1월 하인리히는 자신보다 열 살 연상인 콘스탄체와 결혼하여, 과거 반황제파 도시의 맹주였던 밀라노의 산탄브로지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33][35] 이 혼인으로 교황령을 사이에 둔 남북의 두 강대국이 동맹을 맺게 되어, 로마 교회에게는 위기적인 상황이 되었다.[33]

하인리히는 비테르보의 고드프리에게 교육을 받았고, 프리드리히 폰 하우젠을 포함한 여러 시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지식의 재능으로 구별되고, 유창함의 꽃으로 장식되었으며, 교회법과 로마법에 정통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시인이자 시의 후원자였으며, 현재 바인가르텐 수도원의 노래 악보에 포함된 "카이저 헨리히"라는 노래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89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가 제3차 십자군 도중 사망하자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같은 해 11월 18일 빌헬름 2세가 사망했다.

1184년 결혼 당시의 약정에 따르면, 빌헬름 2세 사후 왕국의 통치권은 콘스탄체와 하인리히에게 상속될 것으로 되어 있었다.[36] 그러나 콘스탄체의 혼인을 추진했던 팔레르모 대주교 구알티에로가 빌헬름 2세에 이어 사망하였고,[37] 1189년 12월 반 로마 제국파 궁정 신하들에 의해 레체 백작 탕크레드가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인리히는 시칠리아로 향하려 하였으나, 작센·바이에른의 군주 하인리히 사자공이 망명지 잉글랜드에서 귀국하였기 때문에, 하인리히 사자공에 대한 대처에 쫓겨 시칠리아 원정이 저지되었다.[38] 1191년 1월에 이르러서야 하인리히는 이탈리아로 향할 수 있었다.[39]

2. 2. 시칠리아 왕위 계승 분쟁

나폴리 공성전, 에볼리의 페트로,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책'', 1196


왼쪽부터: 시칠리아의 빌헬름 3세; 그의 형제와 아버지


목판화, 시칠리아의 콘스탄스, 남편 헨리 6세, 아들 프리드리히 2세 묘사


119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6세가 시칠리아의 빌헬름 3세의 눈과 성기를 없애는 장면 (조반니 보카치오의 Des cas des nobles hommes et femmes [fol. 169r], 15세기, 제네바 도서관 Ms. fr. 190/2).


1184년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 왕 빌헬름 2세의 고모 콘스탄체와 약혼했다. 콘스탄체는 "그녀의 결혼이 시칠리아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팔레르모의 수녀원에 있었다. 빌헬름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콘스탄체는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186년 1월 27일, 하인리히 6세와 콘스탄체는 밀라노에서 결혼했다.[8]

1189년 11월 빌헬름 2세가 사망하자,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 왕위를 노릴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부총리 마테오 디 아옐로는 레체 백작 탄크레디를 지지했고, 교황청도 이를 지지했다. 하인리히 6세는 탄크레디의 라이벌인 안드리아 백작 로제르를 지지하며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했다.[9]

1191년, 하인리히 6세는 하인리히 사자공과 평화 협정을 맺고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남부 이탈리아 상황은 악화되어, 나폴리 공성전에서 패배하고 아풀리아 지역을 탄크레디에게 빼앗겼다. 1194년 2월, 탄크레디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빌헬름 3세가 어머니 아체라의 시빌라의 섭정 하에 왕위를 이었다. 하인리히 6세는 다시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1194년 11월 20일 팔레르모에 입성, 12월 25일에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다음 날, 그의 아내 콘스탄스는 이에시에서 아들 프리드리히 2세를 낳았다.[9]

빌헬름 3세와 시빌라는 칼타벨로타 성으로 도망쳤으나, 레체 백작령과 카푸아 공국을 받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는 쿠데타 혐의로 빌헬름 3세와 귀족들을 체포하고, 빌헬름 3세의 눈과 성기를 제거했다. 빌헬름 3세는 1198년경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195년 3월, 하인리히 6세는 바리에서 호프타크를 열고 콘스탄스를 시칠리아 여왕으로 임명했다. 또한, 우르슬링겐의 콘라드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임명하고, 팔레리아의 월터를 총리로 임명하는 등 시칠리아 행정부를 재편했다.[14]

2. 3. 황제 즉위와 통치

1178년 독일 왕국으로 돌아온 하인리히 6세는 반란을 일으킨 하인리히 사자공에 맞서 아버지를 지지했다. 그와 그의 동생 프리드리히 6세는 1184년 마인츠에서 열린 오순절 국회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6] 같은 해, 하인리히 6세는 에르푸르트 변소 참사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에르푸르트 대성당 2층 바닥이 무너져 약 60명의 귀족이 변소 웅덩이에 깔려 죽었는데, 하인리히 6세는 돌로 된 별도의 알코브에 앉아 있었기에 살아남았다.[7]

프리드리히 1세와 그의 아들들 하인리히와 프리드리히, ''베르프 연대기'', 바인가르텐 수도원, 1180년경




황제는 이미 1184년에 시칠리아 왕 빌헬름 2세와 협상을 시작하여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하인리히 6세를 빌헬름 2세의 고모 콘스탄체와 약혼시키려 했다. 당시 약 30세였던 콘스탄체는 "그녀의 결혼이 시칠리아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팔레르모의 산티시모 살바토레 수녀원에 수녀로 감금되어 독신 생활을 해왔다. 빌헬름 2세의 결혼이 자녀 없이 끝난 후, 그녀는 빌헬름 2세의 유일한 합법적인 상속녀가 되었다. 1189년 11월 빌헬름 2세가 사망한 후,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 왕관을 황제의 왕관에 추가할 기회를 얻었다. 그와 콘스탄체는 1186년 1월 27일 밀라노에서 결혼했다.[8]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우르바누스 3세의 갈등에서 하인리히 6세는 토스카나 변경백국으로 이동하여 그의 대리인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의 도움으로 교황령의 인접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가 1190년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사망함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에노 백작 보두앵 5세를 나뮈르 공작으로 격상시켜 저지대의 통치를 확보하려 했고, 동시에 라이벌인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1세와 타협을 시도했다. 추방된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잉글랜드 왕국에서 돌아와 그의 이전 작센 공국의 광대한 영지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더 큰 어려움이 발생했다. 1189년 11월 18일 시칠리아 왕 빌헬름 2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하인리히 6세는 작센 원정을 포기해야 했다. 시칠리아 부총리 마테오 디 아옐로는 레체 백작 탄크레드의 계승을 추진하여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었다.

상속 분쟁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하인리히 6세는 처음에 탄크레드의 라이벌인 안드리아 백작 로제르를 지지하고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했다. 이듬해 그는 풀다에서 하인리히 사자공과 평화 협정을 맺고 남쪽으로 아우크스부르크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가 1190년 6월 10일 킬리키아 왕국(현재 튀르키예의 일부)의 실리프케 근처 살레프 강(괴크수 강)을 건너려다 십자군 원정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9]

하인리히 6세


하인리히는 이탈리아에 제국군을 파병했지만, 처음에는 제3차 십자군에서 사망한 튀링겐의 루트비히 3세의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에 머물렀다. 그는 몰수된 영지로 튀링겐 영주권을 장악할 계획이었지만, 루트비히의 동생 헤르만이 그의 영지 계승에 성공했다. 다음 해, 국왕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군대를 따라갔다. 로디에서 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미망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협상하여 그녀의 아들인 국왕 리처드와 고 국왕 루이 7세의 딸인 알리스의 약혼을 파기했다. 그는 잉글랜드-프랑스 관계를 악화시키고 시칠리아에서 탄크레드 백작을 지원한 리처드를 고립시키기를 바랐다. 엘레오노르는 영리하게 행동했고, 그녀는 하인리히가 그녀의 아들의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의 갈등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또한 하인리히의 동생인 콘라트와 카스티야의 베렌가리아의 결혼을 막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권력 주장을 제한할 것이었다.

하인리히는 롬바르디아 동맹 도시들과 첼레스티누스 3세와 황제 대관식에 대해 추가적인 협상을 벌였고, 교황에게 투스쿨룸을 양보했다. 1191년 4월 15일 부활절 월요일, 로마에서 하인리히와 그의 배우자 콘스탄스는 첼레스티누스에 의해 황제와 황후로 대관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관은 시칠리아 귀족들이 레체 백작 탄크레드를 왕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얻기가 더 어려웠다. 하인리히는 아풀리아에서 원정을 시작하고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지만, 탄크레드의 봉신인 마르가리투스가 도시 방어에 나서고, 하인리히의 피사 해군을 괴롭히고, 나중에 도착한 제노바 부대를 거의 궤멸시켰을 때 저항에 직면했다. 게다가, 제국군은 전염병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하인리히는 결국 포위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그의 후퇴 후, 하인리히에게 항복했던 도시들은 탄크레드에게 다시 복종했다. 결과적으로, 하인리히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표시로 살레르노 궁전에 남겨진 콘스탄스는 배신당하여 탄크레드에게 넘겨졌다.[9]

하인리히는 하인리히 사자공이 다시 작센 아스카니아 가문과 샤우엔부르크 백작과 갈등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되자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아들 브룬스비크의 하인리히는 이탈리아의 제국군에서 탈영했고, 1192년 펜테코스트 보름스에서 열린 ''호프타크''에서 황제에게 배척당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는 자신의 권력이 제한적임을 깨달아야 했다. 작센에서 그의 가장 가까운 동맹자인 대주교 마그데부르크의 비히만이 사망한 후, 그는 선동적인 사자 하인리히와 또 다른 휴전을 체결했다.

한편, 그의 아내가 시칠리아인들에게 잡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는 탄크레드와 평화를 맺자는 첼레스티누스 3세의 제안을 거절했다. 탄크레드는 하인리히가 그를 인정하지 않는 한 콘스탄스의 몸값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고, 하인리히는 첼레스티누스에게 그녀의 체포에 대해 불평했다. 1192년 6월, 콘스탄스는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의 개입으로 석방되었고, 그 대가로 첼레스티누스는 탄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했다. 콘스탄스는 첼레스티누스 3세가 하인리히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도록 로마로 보내질 예정이었지만, 독일 군인들은 교황령 국경에서 매복을 설치하여 콘스탄스를 해방시켰다.

제국 봉인(1192)의 복제


반면 황제는 사자 하인리히의 사촌 벨프 6세의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슈바벤 공국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1191년 9월 새로운 뤼티히 주교 선거에서 그는 황후 콘스탄스의 외삼촌인 알베르 드 레텔을 지지했는데, 그와 콘스탄스는 모두 알베르를 리에주의 다음 주교로 계획했지만, 선거 당시 황후 콘스탄스는 시칠리아인들에게 감금되어 있었고, 다른 후보인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의 형제인 알베르 드 루뱅이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1192년 1월 하인리히는 선거가 분쟁 중이라고 주장하고, 본의 성 카시우스 교회의 수도사이자 호흐슈타덴 백작 디트리히의 동생인 새로 임명된 제국 수상 로타르 폰 호흐슈타덴을 임명했고, 1192년 9월 그는 계승을 강제하기 위해 리에주로 갔다. 황제의 위협 때문에 리에주의 대다수 선거인들은 황제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알베르 드 레텔도 포기하고 황제가 제공한 금전적 합의를 분개하며 거절했다. 알베르 드 루뱅은 로마의 교황과 랭스 대주교로부터 지원을 구해야 했다. 랭스에서 그는 교황의 동의하에 성직 서품을 받았지만, 얼마 후 고용된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형제인 하인리히 공작은 황제와 평화 협정을 맺기로 했지만, 계속해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인리히 황제는 이미 벨프 지지자 대주교 브레멘의 하르트비히 2세의 폐위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제국의 동쪽 국경인 마이센 변경백국의 갈등에서 중재해야 했는데, 베틴 변경백인 알베르트 1세가 그의 형제인 테오도리히와 튀링겐의 헤르만 변경백의 주장을 막아야 했다. 한편 서쪽의 반대는 브라반트 공국림뷔르크 공국의 공작들이 쾰른 대주교 브루노 3세와 연합하면서 극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황제에 대한 대규모 동맹이 나타났는데, 여기에는 독일의 대총재인 마인츠 대주교 마인츠의 콘라트, 보헤미아 공작 오타카르 1세, 하인리히의 오랜 라이벌인 사자 하인리히, 슈바벤의 체링겐 가문, 잉글랜드 왕실, 그리고 루뱅의 알베르트 살해에 격분한 교황이 포함되었다.[9]

리처드 1세가 헨리 황제에게 항복하는 모습, ''Liber ad honorem Augusti'', 129R쪽


이 시점에서 헨리 6세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바벤베르크 공작 레오폴트 5세가 헨리 6세에게 중요한 포로인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사자왕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레오폴트 5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리처드를 사로잡아 뒤른슈타인 성에 가두어 두었다. 1193년 3월 28일, 리처드는 슈파이어에서 황제에게 인계되어 트리펠스 성에 투옥되었다. 이는 리처드가 레체의 탕크레드와 동맹을 맺었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헨리 6세는 전직 십자군을 투옥한 죄로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로부터 거의 파문당할 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의 몸값을 받고 잉글랜드 국왕을 석방했다. 또한 리처드의 조카딸인 엘레오노르 플랜태저넷이 레오폴트 공작의 아들인 프리드리히와 결혼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약혼시켰다. 반대파인 제후들은 강력한 동맹국의 패배를 직면하고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12]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지원을 받은 리처드는 경쟁자인 동생 모르탱 백작 존과 그의 동맹자인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 맞서 성공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방어했다. 리처드는 막대한 몸값과 추가 이자 지급, 그리고 헨리 6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대가로 석방되었다. 그 대가로 황제는 군사적 폭력의 위협 하에 존이 리처드의 부재 중에 필리프의 승인을 얻어 빼앗았던 프랑스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다. 헨리 6세는 새로운 봉신이자 동맹국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프랑스 왕국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194년 성주간에 슈파이어에서 열린 ''호프타크''(Hoftag)에서 헨리 6세와 리처드는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잉글랜드 국왕은 공개적으로 적대 행위에 대해 후회하고 무릎을 꿇고 황제의 자비를 구했다. 그는 석방되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13]

같은 시기에 헨리 6세는 그의 이복 삼촌인 라인 팔라틴 백작 콘라트의 딸인 아그네스와 헨리 사자의 아들인 브라운슈바이크의 헨리의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써 벨프 가문과의 오랜 갈등을 해결했다. 이어 1194년 3월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한편, 남부 이탈리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나폴리에서의 헨리의 패배 후, 탄크레드의 매부인 아체라의 리처드 백작이 아풀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재정복했고, 탄크레드 자신은 교황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헨리는 로마냐 공동체와 동맹을 맺어 북부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운 통행을 허가받았다. 1194년 2월, 레체의 탄크레드가 사망하여 어린 아들 빌헬름 3세가 어머니 아체라의 시빌라의 후견하에 상속인이 되었다. 5월에 리처드 왕의 몸값을 기반으로 황제 헨리는 다시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오순절에 밀라노에 도착하여 8월에 나폴리를 점령했다. 그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1194년 11월 20일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인 팔레르모에 입성하여 12월 25일에 왕으로 즉위했다. 그 다음 날, 이에시에 남아 있던 그의 아내 콘스탄스가 그의 외아들이자 상속자인 프리드리히 2세 (미래의 황제이자 시칠리아와 예루살렘의 왕)를 낳았다.[9]

어린 빌헬름과 그의 어머니 시빌라는 칼타벨로타 성으로 도망쳤고, 그는 레체 백작령과 카푸아 공국을 대가로 시칠리아 왕국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그러나 헨리의 대관식 며칠 후, 왕족과 여러 노르만 귀족들이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헨리는 빌헬름의 눈과 성기를 없애게 했고, 그의 추종자들 중 많은 수가 화형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칠리아-그리스인인 팔레르모의 유진과 같이 일부는 새로운 호엔슈타우펜 정부로 쉽게 전환했다. 빌헬름은 아마도 슈바벤의 알템스(호엔엠스) 성으로 추방되어 1198년경 감옥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1195년 3월 헨리는 바리에서 ''호프타크''를 열고 그의 아내 콘스탄스를 시칠리아의 여왕으로 임명했지만, 헨리의 충실한 봉신인 우르슬링겐의 콘라드가 세습적인 스폴레토 공작으로 승격되어 황제의 남부 이탈리아 내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황제 대리가 되었다. 그는 트로이아 주교인 팔레리아의 월터가 총리로 임명되는 등 시칠리아 행정부에 더 많은 ''미니스테리아레스''를 배치했다. 그의 충실한 심복인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는 라벤나 공작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 로마냐 지역과 아펜니노 산맥을 통해 시칠리아로 가는 길을 통제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헨리의 동생인 슈바벤의 필립은 고인이 된 마르크그라비나 마틸다의 토스카나에 있는 광대한 영지를 받았다. 황제는 또한 피사제노바의 배를 정부에 약속한 양보 없이 본국으로 돌려보낼 만큼 강력하다고 느꼈다.[14]

헨리의 팔레르모 입성


시칠리아 왕국은 헨리의 개인 및 황제 수입에 유럽에서 유례없는 소득을 더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두 번째 권력 기반으로 시칠리아를 제국에 통합하려는 그의 목표는 그의 생애 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또 다른 십자군에 대한 대가로 통일( ''unio regni ad imperium'')을 승인받기 위한 첼레스티누스 3세 교황과의 협상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한편, ''만국제국 이전'' 개념에 따른 그의 보편 통치에 대한 신념은 비잔티움 제국의 존재와 충돌했는데, 이는 헨리의 팽창주의 정책에서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 왕과 키프로스의 에메리 왕에 대한 종주권 부과에 반영되었다.

1195년 헨리의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부 아드리아 해 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해군 기지 중 하나인 뒤라키움(두라초) 주변의 이전 이탈리아-노르만 영지에 대한 주장을 제기하고 계획된 십자군에 대한 기여를 압박했다. 이사악 2세 앙겔로스 황제의 폐위 후 헨리는 비잔티움 영토 공격을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그는 이미 그의 동생 필립을 이사악의 딸인 이레네 앙겔리나 공주와 약혼시킬 계획을 세웠는데(고의적이든 아니든) 서방 제국과 동방 제국을 호엔슈타우펜 통치하에 통합할 전망을 열었다. 당대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그의 사절들은 이사악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알렉시오스 3세로부터 거액의 공물을 거둘 수 있었지만 헨리가 죽기 전에는 지불되지 않았다.[15]

피사베네치아 공화국 간의 휴전이 끝나자 피사인들은 마르마라 해에서 베네치아 선박을 공격하고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베네치아 건물을 습격했다. 상황이 악화되어 양측은 전쟁을 벌였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피사의 공격 배후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1197년 헨리는 그들에게 휴전을 강요했다.[16][17] 이전에 피사와 제노바는 헨리의 이탈리아 침공을 지원했지만 베네치아는 중립을 선택했다. 그러나 헨리는 피사와 제노바가 요구하는 더 광범위한 특권에 대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면서 1195년과 1197년에 베네치아에 여러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18][19][20] 헨리가 테살로니키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계획된 팽창을 실시했다면 베네치아는 자체 만에 고립되었을 것이고 베네치아는 알렉시오스가 베네치아와의 불화를 해결하기보다는 헨리에게 복종할 것이라는 우려를 했다. 헨리의 죽음은 베네치아와 콘스탄티노플 모두의 우려를 덜어주었다. 헨리의 죽음 소식에 비잔티움의 "독일 세금"은 폐지되었다.[21]

헨리가 죽었을 때 그는 신성 로마 황제, 독일 왕, 부르고뉴 왕, 이탈리아 왕, 시칠리아 왕, 잉글랜드 왕, 소아르메니아 왕, 키프로스 왕의 봉건적 봉신이자 북아프리카 군주의 조공 영주였던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22]

2. 4. 세습 제국 계획과 실패



시칠리아 왕국은 헨리 6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지만, 시칠리아를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기반으로 제국에 통합하려는 그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1197년 십자군 참전을 대가로 시칠리아와 제국의 통합(''unio regni ad imperium'')을 승인받으려던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한편, 헨리 6세의 보편 통치 신념은 비잔티움 제국과 충돌했고, 이는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키프로스의 에메리 왕에게 종주권을 요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195년, 헨리 6세의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뒤라키움(동부 아드리아 해 연안의 핵심 해군 기지) 인근의 옛 이탈리아-노르만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십자군 지원을 압박했다. 이사악 2세 황제가 폐위되자, 헨리 6세는 비잔티움 영토 공격을 공공연히 위협했다. 그는 동생 필리프를 이사악 2세의 딸 이레네 앙겔리나와 약혼시켜 서방과 동방 제국을 통합할 야심을 드러냈다.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헨리 6세의 사절단은 알렉시오스 3세에게서 막대한 공물을 받아냈지만, 정작 헨리 6세가 사망하면서 이 돈은 지급되지 않았다.[15]

피사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의 휴전이 깨지자, 피사 해군은 마르마라 해에서 베네치아 선박을 공격하고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건물을 습격했다. 양측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피사의 공격을 사주한 것으로 의심되었다. 1197년, 헨리 6세는 이들에게 휴전을 강요했다.[16][17] 이전에는 피사와 제노바가 헨리 6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도왔지만, 베네치아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헨리 6세는 피사와 제노바가 요구하는 더 많은 특권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1195년과 1197년에 베네치아에 여러 권리를 부여했다.[18][19][20] 헨리 6세가 테살로니키와 콘스탄티노플 침공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면 베네치아는 고립될 위기에 처했을 것이고, 알렉시오스 3세가 베네치아와의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헨리 6세에게 굴복할 것을 우려했다. 헨리 6세의 죽음은 베네치아와 콘스탄티노플 모두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헨리 6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비잔티움의 "독일 세금"은 폐지되었다.[21]

헨리 6세는 신성 로마 황제, 독일 왕, 부르고뉴 왕, 이탈리아 왕, 시칠리아 왕이었으며, 잉글랜드 왕, 소아르메니아 왕, 키프로스 왕의 봉건적 주군이자 북아프리카 군주의 조공 군주였다.[22]

《마네세 사본》에 묘사된 헨리 6세, 1304년경


1195년 여름, 하인리히 6세는 십자군 원정 지원을 요청하고 후계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독일로 귀환했다. 그는 우선 메이센의 베틴 마르크그라프령 분쟁을 해결해야 했다. 알베르트가 황제령 호엔슈타우펜 영토인 플라이스너란트를 차지하려 하자, 하인리히 6세는 마르크그라프의 동생 테오도리히의 상속권을 부정하고 메이센 영토를 몰수했다. 10월, 겔른하우젠에서 브레멘 대주교 하르트비히와 화해하고, 1196년 크리스마스에 시작될 십자군 원정을 위해 작센과 투링겐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하인리히 6세의 다음 목표는 황제 자리를 세습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 프리드리히 2세를 로마 왕으로 선출하려 했으나, 쾰른 대주교 알테나의 아돌프가 반대했다. 겨울 동안, 하인리히 6세와 측근들은 세습 군주제 구상을 발전시켰다. 세속 제후들은 왕 선출권을 잃는 대신, 황제령 봉토를 세습하고 여성 상속도 허용받기를 원했고, 하인리히 6세는 이를 고려했다. 또한 ''Jus Spolii''와 ''sede vacante'' 시 교회 토지 수입을 포기하여 교회 제후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1196년 3월/4월 뷔르츠부르크 국회에서 그는 대다수 제후들을 설득하여 찬성표를 얻어냈다. 그러나 쾰른 대주교 아돌프는 불참했고, 작센과 투링겐의 여러 제후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었다.[23]

1196년 7월, 하인리히 6세가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와 협상하기 위해 부르고뉴와 이탈리아로 떠난 사이, 독일에서는 반발이 거세졌다. 10월 에르푸르트 국회에서 대다수 제후들은 황제의 계획을 거부했다. 교황 역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시칠리아 지배를 우려하여 협상을 중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에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콘스탄체는 예지에서 아들 프리드리히 2세를 출산했다.[29] 9년간 아이가 없었고, 콘스탄체가 40세의 고령이었기에 출산에 의혹이 제기되었으며,[41] 훗날 프리드리히 2세가 콘스탄체의 친자가 아니라는 전승이 생겨났다.[39]

하인리히 6세는 친구인 콘라트 폰 우르스린겐을 스폴레토 공으로 임명하고,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에게 마르케를 주어 이탈리아 지배를 강화했다. 1195년 바리 궁정 회의에서 십자군 참전을 약속하고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꾀했다.

같은 해 6월, 하인리히 6세는 콘스탄체와 프리드리히 2세를 팔레르모에 남겨두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와 십자군을 준비하는 한편, 프리드리히 2세의 로마 황제 계승을 계획했다. 폼스 제국 회의에서 하인리히 6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로마 왕 선출을 요구했지만, 제후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196년 4월 뷔르츠부르크 제국 회의에서 하인리히 6세는 로마 왕위를 프랑스나 시칠리아처럼 세습제로 바꾸는 대신 제후들에게 왕 선출권을 포기하게 하고, 그 대가로 제후들에게도 상속권을 인정하는 “세습 제국 계획”을 제안했다.[42] 그러나 쾰른 대주교 아돌프의 강력한 반대로 계획은 실패했다.[42]

1196년 여름, 프리드리히 2세의 로마 왕위 승계를 위한 교황청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동생 필리프와 마인츠 대주교의 중재로 1196년 12월 프랑크푸르트 제국 회의에서 마침내 프리드리히 2세가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42] 프리드리히 2세의 황위 계승이 확실해지자, 하인리히 6세는 십자군 파병에 착수했다.

2. 5. 죽음과 유산

하인리히 6세는 1197년 시칠리아의 메시나에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던 중 사망했다. 그의 사인은 말라리아로 추정되지만, 일각에서는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25][26]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메시에나에 안치되었다가 1198년 팔레르모 대성당으로 옮겨졌다.[27] 그의 무덤에서는 화려한 비단 직물을 포함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 일부는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27]

하인리히 6세의 죽음은 여러 정치적 문제를 야기했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너무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쾰른 대주교는 벨프 가문의 오토 4세를 왕으로 추대했고, 이에 반발한 하인리히의 동생 슈바벤의 필립 또한 왕위에 오르면서 거의 20년간 왕위 계승 분쟁이 이어졌다.[9] 결국 프리드리히 2세가 1212년 다시 왕으로 선출되고, 1214년 부비네 전투에서 프랑스에 패배하고 동맹국들에게 버려진 오토 4세가 1218년 사망하면서 분쟁은 종식되었다.

시칠리아에서는 하인리히 6세의 가혹한 통치에 대한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인리히 6세는 반란 주동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했지만, 반란은 계속되었다.[29] 하인리히 6세는 죽기 전 아내 콘스탄스를 어린 아들의 섭정으로 임명했지만, 콘스탄스는 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반대 세력 등 풀어야 할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45]

3. 평가와 영향

하인리히 6세는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트루아퐁텐의 알베리크에 따르면 "지식의 재능으로 구별되고, 유창함의 꽃으로 장식되었으며, 교회법과 로마법에 정통했다"고 한다. 그는 시와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카이저 헨리히'라는 노래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노래는 현재 바인가르텐 수도원의 노래 악보에 포함되어 있다.[4][5]

그는 통치 기간 동안 중세 순회 왕정의 전통에 따라 여러 카이저팔츠(황궁) 거주지들을 오가거나, 주교후의 주교좌에 머물렀다. 그는 왕국의 중심지인 프랑코니아 공국 지역에 집중했으며, 바이에른 공국과 작센 공국 지역은 중앙 권력의 영향을 덜 받았다. 그의 독일 여정과 이탈리아 원정은 그가 매년 발행한 수많은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9] 쾰른 대주교 필리포 1세와 마인츠의 콘라트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크게 의존했다.[9]

뒤셀도르프-카이저스베르트의 카이저팔츠(Kaiserpfalz) 유적, 서쪽 정면("내부" 전망)


시칠리아 왕국은 하인리히의 개인 및 황제 수입에 유럽에서 유례없는 소득을 더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두 번째 권력 기반으로 시칠리아를 제국에 통합하려는 그의 목표는 생전에 실현되지 못했다. 1197년 십자군에 대한 대가로 통일(''unio regni ad imperium'')을 승인받기 위한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와의 협상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한편, ''만국제국 이전'' 개념에 따른 그의 보편 통치에 대한 신념은 비잔티움 제국의 존재와 충돌했는데, 이는 하인리히의 팽창주의 정책에서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 왕과 키프로스의 에메리 왕에 대한 종주권 부과에 반영되었다.[15]

1195년 하인리히의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부 아드리아 해 연안의 뒤라키움 주변의 이전 이탈리아-노르만 영지에 대한 주장을 제기하고 계획된 십자군에 대한 기여를 압박했다. 이사악 2세 앙겔로스 황제의 폐위 후 하인리히는 비잔티움 영토 공격을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그는 이미 그의 동생 필립을 이사악의 딸인 이레네 앙겔리나와 약혼시켜 서방 제국과 동방 제국을 호엔슈타우펜 통치하에 통합할 전망을 열었다. 당대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그의 사절들은 이사악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알렉시오스 3세로부터 거액의 공물을 거둘 수 있었지만 하인리히가 죽기 전에는 지불되지 않았다.[15]

피사베네치아 간의 휴전이 끝나자 피사인들은 마르마라 해에서 베네치아 선박을 공격하고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베네치아 건물을 습격했다. 상황이 악화되어 양측은 전쟁을 벌였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피사의 공격 배후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1197년 하인리히는 그들에게 휴전을 강요했다.[16][17] 이전에 피사와 제노바는 하인리히의 이탈리아 침공을 지원했지만 베네치아는 중립을 선택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피사와 제노바가 요구하는 더 광범위한 특권에 대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면서 1195년과 1197년에 베네치아에 여러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18][19][20] 하인리히가 테살로니키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팽창을 실시했다면 베네치아는 자체 만에 고립되었을 것이고, 베네치아는 알렉시오스가 베네치아와의 불화를 해결하기보다는 헨리에게 복종할 것이라는 우려를 했다. 하인리히의 죽음은 베네치아와 콘스탄티노플 모두의 우려를 덜어주었다. 하인리히의 죽음 소식에 비잔티움의 "독일 세금"은 폐지되었다.[21]

하인리히가 죽었을 때 그는 신성 로마 황제, 독일 왕, 부르고뉴 왕, 이탈리아 왕, 시칠리아 왕, 잉글랜드 왕, 소아르메니아 왕, 키프로스 왕의 봉건적 봉신이자 북아프리카 군주의 조공 영주였던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22]

팔레르모 대성당의 하인리히 묘


1197년 3월, 하인리히는 카푸아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그는 그의 ''미니스테리아리스'' 슈바인스페운트의 디폴트가 감금하고 있던 아체라 백작 리처드를 잔혹하게 처형했다. 그는 시칠리아에 입성하여 메시나에서 십자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이탈리아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통치로의 이행은 특히 카타니아와 시칠리아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안바일러의 마르크바르트와 칼덴의 하인리히가 이끄는 그의 독일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반란군들은 심지어 하인리히 대신 보비노의 조르단 백작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콘스탄스 황후에게 적대적인 일부 당대 독일인들은 콘스탄스가 반란군과 직접적으로 공모했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테오 쾰처의 연구와 같은 최근 연구는 이것이 가능성이 낮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쾰처는 하인리히의 시칠리아에서의 "징계 방법"이 부부 사이의 관계에 금이 가게 했고, 콘스탄스가 수동적으로 반란군을 용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다.[24] 하인리히는 피우메디니시 근처에서 사냥을 하다가 오한으로 병이 들었고, 9월 28일 메시나에서 사망했는데, 아마도 말라리아 때문일 것이다.[25] 비록 일부는 즉시 콘스탄스가 그를 독살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26] 그의 아내 콘스탄스는 그를 메시나에 매장시켰고, 1198년 그의 유해는 팔레르모 대성당으로 옮겨졌다.[9] 18세기 후반 하인리히 6세의 무덤에서 여러 물건이 제거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있다. 여기에는 신발의 일부, 머리띠, 그리고 원래 시신을 감쌌던 화려한 비단 직물이 포함된다.[27]

하인리히의 어린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위를 모두 상속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쾰른 대주교 아돌프 주변의 여러 제후들은 하인리히 사자의 아들 벨프 가문의 브룬스비크의 오토를 반(反)왕으로 선출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프리드리히의 삼촌인 슈바벤의 필립은 1198년 3월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독일 왕위 분쟁은 프리드리히가 1212년 다시 왕으로 선출되고, 1214년 부비네 전투에서 프랑스에 패배하고 이전 동맹국들에게 버려진 오토가 마침내 1218년 사망할 때까지 거의 20년 동안 지속되었다.[9]

하인리히 6세와 관련된 당대의 기록으로는 비테르보의 고드프리나 에볼리의 페트로의 저서, 생 블라지엔의 오토의 연대기, 뤼벡의 아놀드의 『슬라브인 연대기』, 몽의 지슬베르트의 기록, 살레르노의 로무알드 대주교와 산제르마노의 리처드의 연대기, 호브덴의 로저와 틸버리의 저베이스의 서술 등이 있다.

3. 1. 긍정적 평가

하인리히 6세는 일반적으로 재능 있는 지도자로 여겨지며 그의 통치 또한 주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28] 코니히스베르거(Koenigsberger)는 그를 자신의 막강한 권력에 맞서 연합한 서방 여러 왕들의 동맹을 깨뜨릴 수 있었던 "매우 능력 있는 정치가"라고 칭한다.

비테르보의 고드프리나 에볼리의 페트로와 같은 당대 기록에서도 하인리히 6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에볼리의 페트로는 그의 저서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책』(Liber ad honorem Augusti)에서 시칠리아 정복에 관한 하인리히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하인리히의 요절과 그 뒤를 이은 왕위 계승 분쟁을 운명의 장난이자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 치하에서 시작된 독일 민족 국가 발전에 대한 큰 걸림돌로 강조했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 연구는 하인리히를 그의 시대의 인물로 분류한다.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분열적인 세력에 대처해야 했고 동시에 호엔슈타우펜 왕국을 결국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2. 부정적 평가

하인리히 6세는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분열적인 세력에 대처해야 했고, 호엔슈타우펜 왕국을 과도하게 확장하여 결국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8] 시칠리아에서 취한 강경책은 잔혹하고 무자비하다는 평판을 안겨주었다.[9]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와의 갈등을 다룬 호브덴의 로저와 틸버리의 저베이스는 하인리히 6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드러냈다.[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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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book Enrico Dandolo and the Rise of Venice https://books.google[...] JHU Press 2023-07-17
[19] book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5, C.1198-c.130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3-07-17
[20] book The Two Italies: Economic Relations Between the Norman Kingdom of Sicily and the Northern Commune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3-07-17
[21] book History of the Adriatic: A Sea and Its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23-07-17
[22] book Könige und Fürsten, Kaiser und Papst im 12. Jahrhundert https://books.google[...] Oldenbourg Verlag 2023-07-17
[23] 웹사이트 Hochmittelalter http://file.upi.edu/[...] UPI 2020-02-28
[24] encyclopedia Frauen der Staufer https://books.google[...] Gesellschaft für staufische Geschichte e.V. 2023-07-08
[25] book The Anchor Atlas of World History, Volume I: From the Stone Age to the Eve of the French Revolution Anchor Books, Doubleday
[26] book Die deutschen Herrscher des Mittelalters: historische Portraits von Heinrich I. bis Maximilian I. (919-1519) https://books.google[...] C.H.Beck 2023-07-09
[27] 웹사이트 British Museum Collection https://www.britishm[...]
[28] book Medieval Europe 400 - 1500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3-07-17
[29] 서적 シチリア歴史紀行
[30] 문서 로마왕은帝位の前提となった東フランク王位から改称された王号。現代から見れば実質ドイツ王だが、当時国家・地域・民族としてのドイツは成立途中である。またイタリアとブルグントへの宗主権を備える。
[31] 문서 「6世」はドイツ王(東フランク王)としてハインリヒ1世から数えた数字で、皇帝としては5人目のハインリヒ。
[32] 문서 当時はまだ神聖ローマ帝国という国号はなく、古代ローマ帝国内でローマ人と混交したゲルマン諸国及びその後継国家群の総称を漠然とローマ帝国と呼び、皇帝は古代帝国の名残であるローマ教会の教皇に任命され戴冠していた。神聖ローマ皇帝は歴史学的用語で実際の称号ではない。
[33] 서적 初期シュタウフェン朝
[34] 문서 コンスタンツェは、シチリア王国ノルマン朝の創始者ルッジェーロ2世の娘にあたる。1184年当時のシチリア王グリエルモ2世は、コンスタンツェの甥。
[35] 서적 シチリア歴史紀行
[36] 서적 ドイツ史 1 先史〜1648年
[37] 서적 シチリア歴史紀行
[38] 서적 ドイツ史 1 先史〜1648年
[39] 서적 ドイツ史 1 先史〜1648年
[40] 서적 物語イタリアの歴史 解体から統一まで
[41] 서적 物語イタリアの歴史 解体から統一まで
[42] 서적 ドイツ史 1 先史〜1648年
[43] 서적 神聖ローマ帝国
[44] 서적 ドイツ史 山川出版社 2001-08
[45] 서적 ドイツ史 1 先史〜164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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